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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초> 수록작 <식후에 이별하다>에 부쳐
    오늘의 책 2021. 5. 19.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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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에서 
    이별하다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초> 수록작 <식후에 이별하다>에 부쳐

     


    제주도는 이 별의 섬이다. 나는 이 별에서 제주보다 아름다운 섬에 가보지 못했다. 그곳은 유독 아름다운 섬, 몇 번이고 자꾸만 찾아가고 싶은 섬이었다. 그건 비단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나 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주도를 그리워하고 마음을 앓는 이들이 한가득이다. 그런데 제주라는 섬은, 정말 그 모든 이들을 받아줄 만큼, 그들의 마음을 짊어질 만큼 넓고 깊은 섬인 걸까. 


    나는 다시 제주를 그리며 대답해줄 이도, 대답할 리도 없는 내 마음에 의문을 던져본다. 사람들이 왜 그토록 제주에 열광했는지, 제주에 왜 그렇게 많은 카페와 게스트하우스가 생겨나야 했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우리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섬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별하기 위해 이 섬에 왔다.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심보선 「이 별의 일」 전문

    시인은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진짜로 기다리는 것은 멸망 다음에야 올 ‘이별’이다. 그러나 멸망 뒤에는 이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멸망 이후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별을 할 나와 너도, 우리의 마음도. 멸망이란 그 모든 것의 소멸이다. 세상은 물론 ‘너’와 화자 또한 사라질 것이다. 두 사람의 시간과 그들 사이의 이야기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없어서’ 이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멸망이란 이미 그 모든 것을 이별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순간, 화자의 과거, 너의 지금, 우리. 그 모든 것과 이별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세상은 아무 것도 이별하지 못해, 모든 것이 이미 이별한 세상이다. 나와 나의 이별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멸망의 그 순간, 이별하게 되리라. 

    식은 커피를 마신다. 식은 커피를 즐기거나 좋아하는 탓은 아니다. 커피는 그냥 식어버렸다. 커피를 식히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식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 혀가 데지 않을 만큼, 뜨거워서 깜짝 놀라지 않을 만큼의 온도가 되길 바랐을 뿐이었다. 내가 아프지 않을 만큼만 다치지 않을 만큼만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한걸음 물러서서 기다렸을 뿐인데, 커피가 식어버렸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중에서

    화자는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 사랑은 끝이 났다. 그들의 사랑은 휘저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흰죽처럼 고요한 풍경. 재미없는 것. 그들은 아마 식후에 이별하게 될 것이다. 이별을 이야기하게 되리라. 
    딴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커피가 식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는지 모른다. 내가 왜 제주도에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른다. 조용한 제주의 카페. 이 별의 섬은 왜 내게 품을 내어준 걸까. 그냥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버리지. 나 같은 거 그냥 섬 밖의 날들에 머물게 할 것이지.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중에서
     
    내가 너를 굶주리게 했다. 하지만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것’이다. 너를 외롭게 했던 것은 반드시 ‘나’였으리라. 너는 가끔 나를 미워했을 것이다. 경멸하고 증오했을 것이다. 그러나 네 배를 주리게 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네가 배가 고팠던 만큼 나도 배가 고팠다. 하지만 안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다.

    너를 생각하는 사이 커피가 식었다. 창밖에 비가 흩뿌린다. 제주의 날씨는 늘 이렇게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가늠할 수 있었다한들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는 결국 비를 맞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별했을 것이다. 식은 커피처럼, 내가 가졌던 모든 순간은 갔다. 가버렸다. 가장 맛좋은 순간의 커피를 기다리다 그 순간을 놓쳐버렸듯, 얼결에 놓쳐버린 것도 많았다. 찰나와의 이별. 지금 여기 ‘나’와의 이별. 모든 것이 지나갔다.


    시인에게 이별은 그런 것이었을 테다. 자신의 모든 순간과의 이별. 커피가 식어버렸듯 모든 것이 지나갔으리라. 사랑 질투 미움 광기 두려움 희망 절망…… 그는 이미 모든 것과 이별했다. 그는 알았을 것이다. 격정의 순간마저 사라져버린 것은 그의 잘못도, ‘너’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니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멸망을 기다리는 일뿐. 이별조차 남아 있지 않은 멸망 이후를, 모든 것이 이별하게 될 멸망의 순간을. 그는 기다리고 있다.

     



    너와 나, 당신, 우리가 이 섬에 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제주는 섬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 고립된 땅. 이유가 어찌 됐건 이별할 수밖에 없는 곳. 우리가 제주에 온 건 스스로를 반강제적인 이별의 상황으로 몰아넣기 위해서였다. 당신은 그저 이별이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제주에 도착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많은 것과 이별했고, 또 더 많은 것들과 이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리는 이별하기 위해 알던 많은 것들을 ‘그곳’에 두고 이 섬에 왔다. 당신이 두고 온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누군가에겐 부모, 누군가에겐 연인, 누군가에겐 직업, 누군가에겐 물건 또 누군가에겐…… 우리는 이별하려는 그것들로부터 도망쳐왔다. 오로지 이별밖에 남지 않는 섬으로 말이다. 이별하기 좋은 섬으로. 이 섬에 도착한 순간은, 이미 지독한 멸망이다. 멸망 뒤에 이별이 오리라. 아니 어쩌면 멸망 뒤엔 이별조차 없으리라. 



    제주도는 이별의 섬이다. 두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기 위하여! 휘저어도 제자리로 돌아오던 흰죽처럼 무의미해진 순간을 던져내기 위하여! 철저하게 멸망하기 위하여. 이별하기 위하여! 우리는 제주까지 왔다. 


    그러니 우리, 멸망을 기다리자. 

    그다음에 이별하자. 

    식어버린 커피를 모두 마시고 이별하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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