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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정교열 후기] 여배우 여주인공 미망인 여류를 지우는 시간.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글을 위해
    카테고리 없음 2021. 5. 2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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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본업은 출판편집자로, 책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출판편집자는 저자(작가), 번역가, 디자이너, 에이전시, 제작처 등과 직접 소통하며 책을 만들어요.



    경우에 따라 기획이나 취재 같은 부분도 직접 작업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프리랜서로 출판사 밖에서 일을 받아서만 일하다보니, 본문 교정교열과 표지 카피와 보도자료(출판사 서평) 작성 등에 국한된 일을 주로 하고 있어요!

    특정 출판사에 속한 직원이 아니니
    또 저자와 소통이 잦고 출간 후 북토크 등 이벤트가 많은 국내서보다는
    특별한 소통 없이 번역된 글만 잘 다듬어 완성하면 되는 번역서를 많이 작업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영화감독의 전기를 맡아 작업했는데요,
    한 인물의 생애를 다룬 책이다보니 분량이 어마어마했어요.
    그 방대한 분량의 글에서도 교정 중 유난히 반복해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여-(女)’가 접미사로 붙은 단어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배우, 여대생, 여학생, 여농부, 여주인공 등이었지요.
    같은 책 안에서 남배우, 남대생, 남학생, 남농부, 남주인공이라는 표현은 하나도 없었고, ‘남-(男)’을 붙이지 않은 기본형 단어(배우 학생 농부 주인공 등)가 남성을 의미하는 것을 전제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번역자 선생님도 아마 깨닫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이런 표현들을 반복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책에 있는 모든 ‘여-’를 삭제해야겠다고 판단하고 교정 작업을 진행했어요.
    단, 글의 내용상 해당 인물의 성별이 꼭 드러나야 하는 경우, 기존과 같이 접미사 식으로 쓰지 않고 ‘여자’라는 단어를 넣었습니다. 또 같은 문단 안의 남성도 ‘남자’라는 단어를 넣는 동일한 방식으로 성별을 밝혔지요.



    비슷하지만 또 다른 이유로 바로잡은 말도 있었는데, 바로 “미망인, 여류”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미망인(未亡人)”은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었어야 했는데) 아직 죽지 않은 죄인”이라는 뜻의 한자어로, 쓰지 않기를 권장하는 말입니다.
    -> 그 단어가 담고자 하는 의미만 살려
    ‘남편을 잃은’ ‘남편을 일찍 여읜’ 등으로 풀어서 써주었답니다.

    여류(女流)”는 일부 명사 앞에서 관형어로 어떤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는 여자를 이르는 말인데요.
    여류 작가, 여류 화가, 여류 시인과 같은 말로 많이 쓰죠.
    하지만 이 역시 과거 여성이 이런 특정 분야에서 활약하지 못하던 때 만들어진 말이기에, 사용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 교정 시 문맥상 ‘여류’를 떼어내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문장이라 모두 ‘여류’를 삭제했습니다.



    이밖에도 ‘고아/고아원’ 같은 단어도 가능하면 다른 표현으로 바꾸고자 노력했어요.
    ‘고아’라는 단어는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에 대한 이슬아 작가님의 칼럼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었거든요.
    우리가 쉽게 쓰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들에 대해서요.

    <경향신문 칼럼: [직설] ‘부모’ 말고 ‘고아’ 말고 by 작가 이슬아>
    https://news.v.daum.net/v/20201229030207952

    제가 ‘여’를 지우는 교정에 골몰해 있을 때,
    같은 주제로 쓰인 번역가 이지수 님의 칼럼을 읽기도 했습니다.
    수년 전 본인이 번역했던 책에서 “여배우”라는 단어를 발견하곤 움찔했다는 일화로 시작하여, 성평등 언어와 상처 주지 않는 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글을 읽고 저도 더 힘을 내서 이 글에 스며 있는 불평등한 과거의 언어를 빼내는 데 애쓸 수 있었답니다.

    <조선일보 칼럼: [일사일언] 새로운 단어, 늙은 단어 by 번역가 이지수>
    https://news.v.daum.net/v/20210330030322450



    말과 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시간이 쌓이며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책을 만드는 편집자의 가치관과 노력이 독자에게 전달된다면,
    우리 사회의 말과 그 영향도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
    기대하는 시간이었어요. :-)

    누구도 상처 주지 않는 말.
    그런 말의 세상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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