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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당신이 잘 기억나질 않아요, <이터널 선샤인>그 영화 다시 보기 2021. 5. 19. 01:07728x90728x90
이제는 당신이
잘, 기억나질 않아요
-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부쳐
특별했던 사랑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빛나던 눈동자, 긴 시간 함께 나눴던 대화, 그때의 그 목소리, 당신의 사상들. 그런 귀중했던 기억을 끝내 잊어버리고 사는 이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물론 나는 어렸고, 스스로 원한다면 내가 가졌던 사랑의 모든 조각들을 잘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시절이었다.
이별 후, 그 이별로부터 또 긴 시간이 흐르고 나는 문득 당신을 떠올린다. 문득 떠오른 당신은 선명하지 않아서 나는 당신을 곰곰 생각해본다. 생김새, 표정, 목소리, 살결, 체온, 생각들…. 그런데 오랫동안 앉아 그려보아도, 이제는 당신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얼 좋아했고 어떤 표정을 곧잘 지었는지, 당신과 나 사이에 어떤 비언어가 존재했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사랑했을 그 모든 것이 이미 저만치 가버리고 없다. 일부러 지운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것들은 몽땅 사라져버렸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연인이었던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아픈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에서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며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 먼저 기억을 지워버린 클레멘타인 때문에 충격에 빠진 조엘은 자신도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막상 사랑했던 기억이 사라져갈수록 마음속에 새겨진 추억들을 지우고 싶지 않아한다. 기억회로 속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이곳저곳으로 도망친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엉엉 울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는 과정, 그리하여 사랑했던 두 사람이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떨어져나가는 순간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기로 하고 기억을 지우는 회사를 찾아간 두 사람의 결정도 너무나 야속했다. 내게는 자의로 사랑을 잊게 만든다는 설정이 너무나도 잔인하게 느껴졌다.
나는 유독 내가 가졌던 사랑의 기억에 대한 강박을 품곤 했다. 늘 잊지 않기 위해서 연인과 함께했던 흔적들을 차곡차곡 모았다. 선물이나 편지, 사진은 당연하거니와 같이 보았던 공연 티켓부터 시작해 작은 쪽지, 메모들, 가끔은 병뚜껑 같은 것까지, 무엇 하나 쉽게 버리지 못했다. 행여 이것들을 잃어버림으로써 기억조차 잊어버리게 될까봐 추억 상자가 잘 있는지를 늘 먼저 살폈다.
<이터널 선샤인>의 이야기가 제법 충격적으로 각인되었던 탓인지, 언젠가는 영화와 제법 비슷한 상황에 놓여 가슴이 철렁해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어느 날 당시 사용하던 SNS 계정에서 군인이었던 애인의 모든 댓글과 게시물이 사라져버렸다. 연락도 할 수 없고 마음대로 만날 수 없었던 때였던지라 그게 꼭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엔 정말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내가 그 사람을 알기는 했던 것일까’ 하는 물음에까지 가닿았을 땐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 물론 그 사람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나의 연인이었고 우리의 기억도 온전했다. 단지 내가 SNS ‘비활성화’ 기능을 아예 모르던 상황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잊지 않으려고,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발버둥 치더라도 사랑은 결국 잊혔다. 이별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 아주 자연스럽게 조금씩 증발했다. 내가 지우든지, 다른 무엇에 의해 지워지든지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기억이 소멸될수록 사랑의 추억은 조금씩 몸집을 줄여갔다. 가슴 아플 것도 없고, 야속하거나 잔인한 일도 아니었다. 추억 상자 안에 무엇을 얼마만큼 담든 그것은 결국 영원할 수 없었다. 사라질 것은 결국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다.
“미안해요, 이제는 당신이 잘 기억나질 않아요.”
언제부터인가 시간을 들여 곰곰이 떠올려도 선명해지지 않는 당신에게 나는 미안했다. 더 잘 기억하지 못해서, 더 오래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데 이제는 흐릿해진 당신의 그 모든 것이, 그 목소리와 표정이 내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괜찮아요, 나도 그렇게 당신을 잊어가고 있어요.”
그렇게 그 시절의 사랑은 모두 ‘완전히’ 끝이 났고,
우리는 잊고 잊히며 살아가고 있다.
<이터널 선샤인>을 인생영화로 꼽는 이들 중엔 INFP가 많다고 한다. 728x90728x90'그 영화 다시 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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